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

죽음의 임박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삶에 대한 애착을 느낀다. 이것은 뭔가 전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가 그 참맛을 잃어버린 대상이 어쩌면 삶 자체가 아니라, 다만 우리가 영위하는 삶의 일상적인 버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운명이라고 시인한 까닭에, 더 나아가서 각자의 우선순위를 재평가해야 한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이 최우선이 되어야 할지를 자문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완전한 삶은 정확하게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죽음 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이든 ‘마지막’이라고 느끼는 순간 생각이 갑자기 전환되는 경험을 종종 한다. 그래서 나는 감정적으로 행동할 때나, 어떤 선택의 길에 있을 때 ‘이게 마지막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혼자 되묻곤 하는 것 같다.

특히, 좁은 시야로 무언가를 볼 때 이런 되물음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서 지금 당장은 화가 너무 나는 상황이 있다고 치면, 이 질문을 나에게 함으로써 같은 상황을 0.5x배로 보게 된다. 그러면 나한테 있어서 뭐가 정말 중요하고, 단지 이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깨닫게 된다.

오히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떻게 하면 시간 낭비를 중지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삶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이며, 더욱이 충분히 실용적이면서도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은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현재를 소중히 하며, 특히 나에게 있어서는 사소하게 나를 괴롭히는 감정 낭비들을 줄이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순위를 적용하는 법을 배우자. 무엇이 나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가 생각해보기


나를 위해서 읽는 방법

외로움의 치료제

소설 속 등장인물의 경험은 인간의 습성에 대한 엄청나게 확장된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사고나 감정의 본질적인 정상성에 대한 확신을 제공한다.

침대에 누워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구체화하는 프루스트의 화자를 목격하노라면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가?

두 사람이 혜어질 때, 배려의 말을 건네는 쪽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위 문장을 읽고 격하게 공감을 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 또는 행동을 하는 인물을 보는 것이 소설을 읽는 묘미인 것 같다. 보통 마음이 허할 때 소설 책을 많이 있는데 그 이유가 딱 설명이 됐다. 나와 같은 실수를 한 인물을 보면 괜히 위로가 되고 안도감이 드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또는 같은 경험을 나눴다면 더욱 공감이 된다).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

“푸딩의 증명은 먹어보는 것(The proof of the pudding is in the eating)”, 즉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을 빗댄 표현이다.

프루스트 시각에서 보면, 우리는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고통을 겪고 나서야, 무엇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것을 진정으로 배우게 된다.

늘 내가 한 단계 성장했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고통스러움을 느꼈을 때인 것 같다. 그 순간은 분명 지옥같겠지만, 명심해야하는 것은 나는 더 나은 자신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 시기야말로 나를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시기이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그런 일이 있다면, 무엇이 문제였는지 나 자신을 심해까지 파고들어 객관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다음에는 두번 다시 그러한 결과가 일어나지 않도록 단단히 배우게 된다. 푸딩의 증명은 먹어보는 것이다. 고통을 받을 때에 우리는 적절하게 탐구적이 될 수 있다.

“행복은 몸에 좋지만, 정신의 강인함을 발달시켜주는 것은 바로 슬픔이다.”